
생체시계 ‘위상(phase)’이라는 개념에 대하여
할머니들은 새벽 5시면 하루를 시작한다.
아직 어둠이 남아 있는 시간인데도 이미 부엌 불이 켜진다.
반대로 많은 젊은 사람들은 그 시간에 깊이 자고 있고,
밤 12시가 넘어서야 겨우 졸리기 시작한다.
같은 하루를 살아가는데
왜 누군가는 새벽이 아침이고,
누군가는 밤이 하루의 시작일까.
이건 의지나 성격의 문제가 아니라
몸 안에 있는 ‘시계의 위치’ 차이에 더 가깝다.
수면의학에서는 이 차이를
‘위상(phase)’이라고 부른다.
우리 몸에는 24시간짜리 시계가 있다
인간의 몸에는 ‘생체시계(circadian rhythm)’가 있다.
이 시계는 생각보다 많은 걸 조절한다.
- 언제 졸릴지
- 언제 깰지
- 언제 집중이 잘 될지
- 언제 체온이 떨어질지
- 언제 배가 고플지
하루의 거의 모든 리듬이 여기에 맞춰 움직인다.
즉,
우리는 시간을 보며 사는 게 아니라
몸 안의 시계에 끌려가며 살고 있다에 가깝다.
수면의학에서 phase(위상)란 무엇일까
phase라는 단어는 조금 낯설지만, 뜻은 단순하다.
phase는 ‘하루가 언제 시작되느냐’라기보다
평균 생체리듬에 비해
내 시계가 얼마나 앞서 있거나 늦어져 있는지를 나타내는
상대적인 위치 값에 가깝다.
예를 들어
밤 10시에 졸리는 사람과
새벽 2시에 졸리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둘 다 7시간을 자더라도
‘졸림이 시작되는 시점’이 서로 다르다.
수면의학에서는
이렇게 기준보다 앞당겨지거나 늦춰진 시간 차이를
위상(phase)이라고 부른다.
쉽게 말하면
내 몸의 시계가 평균보다 얼마나 빨리, 혹은 늦게 가고 있는지 보여주는 값이다.
위상이 앞당겨지면, 아침형 인간이 된다
어떤 사람은
- 저녁 일찍 졸리고
- 새벽에 자연스럽게 눈이 떠진다
이걸 phase advance(위상 전진)이라고 한다.
몸의 시계가 평균보다 ‘앞쪽’에 놓인 상태다.
보통 이런 패턴을 보인다.
- 취침 9~10시
- 기상 4~6시
우리가 흔히 말하는 ‘아침형 인간’이다.
흥미롭게도
- 어린아이
- 노년층
에게서 특히 많이 나타난다.
위상이 늦어지면, 밤형 인간이 된다
반대로
- 밤 늦게까지 말똥말똥하고
- 아침에 일어나기 힘든 사람
이 있다.
이건 phase delay(위상 지연) 상태다.
몸의 시계가 평균보다 ‘뒤쪽’으로 밀린 것이다.
보통 이런 패턴이다.
- 취침 새벽 1~3시
- 기상 오전 9~11시
대부분의 청소년과 20대가 여기에 해당한다.
게으른 게 아니라
그 시간에 졸리지 않도록 몸이 설계되어 있는 상태다.
그럼 기준 phase는 무엇일까?
여기서 자연스럽게 이런 질문이 생긴다.
“뭐가 정상이고, 뭐가 밀린 거지?”
수면의학에서의 기준은
‘평균 성인 리듬’이다.
대략
- 취침 10~11시
- 기상 6~7시
이 중간값을 기준으로 잡는다.
이보다 빠르면 advance
늦으면 delay
이렇게 부르는 것이다.
즉,
용어일 뿐이고 좋고 나쁨의 문제는 아니다.
왜 젊은 사람만 유독 밤형일까
이게 가장 흥미로웠다.
사실 인간은 기본적으로
해가 지면 자고, 해 뜨면 깨는 동물이다.
아기와 노인을 보면 거의 그렇다.
오히려 청소년~청년기만 예외적으로 늦어진다.
이 시기에
- 멜라토닌 분비가 늦게 시작되고
- 졸림이 2~3시간 밀리고
- 자연 기상도 늦어진다
정확한 이유는 아직 연구 중이지만
진화적 가설도 있다고 한다.
젊은 개체가 밤을 지키고
어른과 노인이 새벽을 맡는 식으로
집단의 활동 시간을 나눴을 가능성.
어찌 됐든 중요한 건 하나다.
밤형은 ‘게으름’이 아니라 ‘생리적 단계’라는 것.
나이가 들수록 다시 아침형으로 돌아간다
재미있게도
- 청년기 → delay
- 노년기 → advance
이렇게 다시 앞당겨진다.
그래서 많은 어르신들이
“일찍 자고 싶지 않은데 졸려”
“더 자고 싶은데 새벽에 눈이 떠져”
라고 말한다.
의지가 아니라
생체시계가 이동한 결과다.
몸이 그냥 그렇게 바뀐다.
아침형 인간은 훈련으로 만들 수 있을까
완전히 타고난 리듬을 바꾸긴 어렵다.
하지만 조금 앞당기는 건 가능하다.
생체시계는 생각보다 단순하다.
빛과 습관에 크게 영향을 받는다.
그래서 이런 방법이 도움이 된다.
- 아침 햇빛 쬐기
- 기상 시간 고정
- 밤 조명 줄이기
- 늦은 시간 스마트폰 최소화
- 저녁 활동 단순화
즉,
“아침은 밝게, 밤은 어둡게”
이 기본 원칙만 지켜도
위상이 서서히 앞당겨진다.
노년층의 생활 패턴이
사실 가장 이상적인 수면 위생에 가까운 이유다.
어쩌면 우리는 각자의 ‘시간대’를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같은 시계로 살아가지만
몸 안의 시간은 조금씩 다르다.
누군가는 새벽이 가장 맑고,
누군가는 밤이 가장 또렷하다.
그래서 이제는
늦게 자는 나를 탓하기보다
내 몸의 리듬을 먼저 이해하려고 한다.
잠은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결국 시계의 위치 문제였으니까.
아침형 인간이 되고 싶다면
나를 바꾸려 애쓰기보다
몸의 시간을 조금씩 앞당기는 환경을 만드는 게
더 현실적인 방법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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